2024.04.14.(일)
울산 남구 달동에 소재하고 있는
강남초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올해로 어느덧 2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2001년 2월에 졸업하였으니,
53회 졸업을 했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는
1990년대 과도기 시절에 다녔고,
외환부족으로 인한 IMF 경제위기를 겪었으며,
(우리 아버지도 결국 구조조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 일자리들을 전전하셨다. 이후 둘째 누나가 거액의 카드빚을 지게되면서 신용불량자가 될 뻔한 카드대란 사태까지 겪었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때 16강 진출이 좌절된걸 본적 있었고,
밀레니엄 2000년을 초등학교에서 보냈으며,
요즘에는 흔한 휴대폰 하나 없었던 시절이며,
가정폭력, 교내체벌과 학교폭력이 만연하던
야만의 시절을 보냈었다.
벌써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많은 추억들이 있다.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남초등학교.
요즘 초등학교에는 외부인 출입이
거의 불가하다고 하는데,
(과거 1990년대에만 하더라도 교문 울타리가 없었기에
외부인이 수업시간에 초등학교에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때마침 일요일에는 개방돼 있어서
옛 추억도 떠올릴겸 방문해 보았다.
강남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무심코 놓쳤던 많은 비석들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초등학생시절 이렇게 많은 비석들이 있을 줄은 몰랐었던것 같다.
모두 198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새천년 느티나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으로 올라가던 시절,
2000년 1월 1일에 심었다.
그 당시에 나무를 심는 행사를 진행했던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 기억으론
타임캡슐도 이곳 어딘가 묻었던걸로 기억한다.
2020년? 2030년? 쯤에 다시 꺼내서 개봉한다고 하며
타임캡슐을 어딘가 묻었었는데,
지금은 타임캡슐이 어디로 갔는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소식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꺼냈거나
아니면 여기 새천년 느티나무 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새천년 느티나무의 모습.
그 당시 심을때만 하더라도 애기목으로 작았던걸로 기억하는데,
20여년이 지나 벌써 이만큼 자랐다.
강남초등학교 정문의 모습.
정문은 내가 6학년이었던
2000년 5월에 준공된 것이다.
'배움터 지킴이실'이 인상적이다.
우리 시절엔 이런 경비실 하나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안전한 환경에서 수업을 듣는것 같다.
그시절엔 당연했던 선생님의 교내체벌도
요즘 시절엔 없는것 같다.
정문 바로 옆은 지금은 운동장이지만
과거엔 2층 규모의 병설유치원과 급식실이 있는 기다란 건물이 있었다.
화장실도 쪼그려앉아서 용변을 봐야하는 화변기였다.
수업을 듣는 본관 건물과 급식실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점심시간만 되면
본관 건물에서 운동장을 거쳐
급식실까지 후다닥 뛰어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급식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는것도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시절만 하여도
밥과 반찬을 남기지않고 모두 먹어야만
식판과 수저를 반납대에 반납할 수 있었다.
식판과 수저, 음식물쓰레기를 버릴수 있는
반납대 앞에는
초등학교 5-6학년 고학년쯤 되는
선배들이(주로 여학생 누나였다.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날 듯 하다.)
항상 지키고 서있었는데,
밥과 반찬을 눈에띌 정도로 많이 남기고
식판을 가져오는 학생에게는
"먹고와!"하며 돌려보내며 식판과 수저 반납을 못하게했었다.
음식을 남기는것을 마치 죄인것처럼 여기던 시절이다.
식판과 수저를 반납하는것도 눈치싸움이었다.
음식을 도저히 다 못먹겠다 싶을땐
아이들이 한꺼번에 식판을 반납하러 갈때
몰래 끼어들어가 반납대 앞에 서있는
선배 여학생 누나의 눈을 피해 반납해야만 했다.
한번은 반납대 앞을 지키고 서있던 선배 여학생 누나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때
몰래 반납대에 가서 남은 잔반을 응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이곳을 정리하던 급식실 직원(조리원) 아주머니와 마주쳤는데,
나를 노려보듯이 한참을 째려보던 기억이 있다.
그때 조리원 아주머니의 살기 가득한 눈빛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일을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에게 이렇게 급식실에서 잔반을 남기지 못하도록 먹기 사역(使役)을 하는것도
엄연히 가혹행위며 폭력이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던 그 시절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농부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밥과 반찬의 소중함을 가르친다는
꽤나 그럴싸한 취지로 잔반을 남기지 못하게 아이들을 교육하려 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들이 직접 정량 배식을 하는것도 아니었고
또 장염이 있거나 맛이 없거나 기타 등등
개인적 여러 이유로
잔반을 다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텐데,
불교 승려들의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는것도 아니고
초등학교에서 왜 그런 먹기 사역(使役)으로
아이들을 상대로 가혹행위를 한건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강남초등학교 본관 건물의 모습.
옛 빨간색에서 깨끗한색으로 도색된것 외에는
건물 외관은 하나도 안 바뀌었다.
뒤에 있는 건물은 달동월드메르디앙 아파트.
원래 이 자리에는
오래되고 노후화된 한국타이어 공장이 있었다.
새까만 공장에 늘 고무타는 냄새가 가득했던 곳이다.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도 있다.
독특한 손짓을 하고 있는 이 동상을 봤거나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라 본다.
1980년대 그 시절엔 교련과목이 있던 시절이고,
당시 군인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였기에
요즘 아이들에겐 낯선 단어인
반공(反共) 교육을 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병설유치원인것 같다.
내가 다니던 시절엔 없었던 건물이다.
급식실도 이곳에 있는것으로 알고있다.
이제 초등학교 후배들은
더이상 급식실까지 멀리 뛰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래운동장의 모습.
과거엔 지금보다 운동장이 훨씬 크고 휑휑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본관 출입문
내가 초등학생 시절 늘 이곳 우측 출입문을 통해
1층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신고 들어갔었다.
아침 학교 등굣길에는
본관 건물앞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동요가 항상 흘러나왔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에헤라디야 바람분다~"로 시작하는
연날리기라는 이름의 동요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출입문은
과거엔 축구부가 있었다.
같은반 아이 중에도 축구부 소속이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창고인것 같은데,
내가 학교다니던 시절엔 존재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본관 건물 모습.
이렇게 본관 앞을 보고 있을때면
당시 시설직(공무직)으로 일하던 나이 많은 어르신 직원이 떠오른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설직(공무직) 직원이 맞을것이다.
아이들에게 여러가지 잡일과 허드렛일을 자주 시켰곤 했었는데,
이제 겨우 12살~13살 밖에 안된 내가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고 어색하다보니
잘 못하기도 했었는데,
나이 지긋한 시설직(공무직) 직원이
나한테 "야 이 바보야", "야! 너 그거 하나 못해?"라며
상습적으로 인격적인 모욕을 주기도 했었다.
그때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여전히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토록 나를 박하게 대하던 시설직 직원이
아무리 아버지 삼촌뻘이라고는 하지만
참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요즘은 못배우고 모난 어른들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모욕적이고 경박스럽게 말을 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
요즘은 당연히 이런 일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엔 초등학교에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선생님들의 체벌이 아주 흔했던 시절이다.
물론 마음씨 따뜻하고 좋은 선생님들도 계셨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따뜻한 마음보다는 분풀이 대상마냥 폭력을 휘두르는 선생님들이 계셨던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1990년대의 초등학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
어른 팔길이 만한 회초리를 들고다니며
아이들을 폭행하던 담임선생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구렛나루를 꼬집는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요즘엔 아이들에게 꼬집는것도 엄연히 폭행에 해당한다.)
얼굴 따귀를 얻어맞은적도 있었고,
대걸레자루로 엉덩이를 얻어맞은적도 있었으며,
체육시간 운동장에서 줄을 비뚤게 섰다는 이유로
내 허벅지를 발로 세게 걷어차기도 했었다.
위에 열거한 교내체벌들은 실제로 내가 모두
강남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직접 겪었었다.
체벌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 초등학교 3학년때 였는데,
나는 그 선생님의 존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체벌이 정말 심했던걸로 기억한다.
표독스러운 외모 만큼이나
그 선생님은 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었다.
(신정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기간제 영어 선생님과 외모가 상당히 많이 닮았었다.
그 선생님도 그런 표독스러운 외모로 학생들을 마구 때리며 강압적으로 영어를 가르치셨었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한 가지를 떠올려보자면,
당시 교실에는
어린이용 숫자, 알파벳이 그려진 퍼즐매트가 깔려있었는데,
(면적이 그리 넓진 않았다.)
이를 어떤 학생이 놀다가 흐트려놨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 얌전한 이국적인 외모의 여학생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은 퍼즐매트를 흐트려 놓은 범인 학생을 무조건 잡겠다며,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 기물을 고의로 파손한 것도 아니고
퍼즐매트는 다시 열심히 조립하면 되기에 수업운영에 문제를 초래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 여학생은 어린 나이에 겁이 나서 바로 자수를 못했을뿐, 별로 큰 잘못을 한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 쌓인 스트레스를 학생들을 상대로 사소한 것 하나하나 트집잡아서 괴롭히며 화풀이하는 체벌이었다.)
그 학생이 자수할때까지
반 학생들 전부 한명씩, 한명씩 돌아가면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대걸레자루 같은걸로 엉덩이를 계속 얻어맞는 체벌을 당했었다.
그때가 이제 겨우 10살,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이제 겨우 9살~10살밖에 안된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얼굴에 따귀를 때리고, 발로 허벅지를 걷어차고,
저런 사소한 이유를 가지고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트집잡아서
대걸레자루로 엉덩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일이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면
믿을 수 있을까.
요즘 시절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아이들의 학교폭력도 일상이었다.
요즘 직장에서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직장내 괴롭힘,
강약약강(強弱弱強)에 온갖 꼰대질과 텃새는
이미 학창시절부터 오랫동안 학습되어온 습관들이
그대로 우러나오는 것이리라 본다.
같은 반 친구가 그저 힘 약하고 만만해 보인다며
괴롭히고 왕따 시키는게 일상이었고,
상습적으로 같은 반 친구들을 폭행하고 다니던 아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나도 초등학생 시절 학폭 피해자였다.
괴롭힘을 당해 엎드려 울고 있는 나를
끊임없이 때리며 폭행하던 친구도 기억하고 있고,
중학생 시절, 학원 버스에서 내리던 나를
발로 걷어차던 초등학교 친구 이름도 기억하고 있으며,
(이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때 나와 같은 반으로 상습적으로 싸움을 일으킬만큼 문제아였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경주OK청소년 수련장에서 진행한 수련회때
1일차 취침하기 위해 남학생 단체 숙소에서 이불을 펴다가
자신을 옆에서 방해했단 이유로
나를 발로 걷어차며 폭행하고
화장실로 끌고가서는 죽이겠다는 식으로 협박하던
6학년 같은반 아이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다른 아이가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
난 그때 화장실이라는 밀실에서
가해 학생과 단둘이 있었을때의 느꼈던 극한의 공포를
2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술을 마시고 매일같이 가족들을 괴롭히고 폭행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던 아버지와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코피가 터질때까지 주먹으로 내 입을 때리고
회초리로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때까지 때리던 어머니의 가정폭력이
집에서도 나에겐 늘 일상이었지만,
이토록 큰 공포를 느꼈던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내가 이렇게 맞아 죽는구나라는걸
아마 어린 나이에 그때 처음 느꼈던것 같다.
실제로 그 아이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싸우는걸 목격한적 있었고,
운동장에서 여러 아이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가를 폭행하기도 했을 만큼 질이 나쁜 아이였던걸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도 이런 교내폭력 상황에
사실상 무관심하였다.
당시 6학년 나의 담임선생님은
정말 죄송스럽지만 전혀 존경함을 찾을 수 없었고,
결코 훌륭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그 담임선생님은 이후 다른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던것 같은데,
지금은 퇴직하신것 같다.)
그 시절 나를 폭행했던
모난 가해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그때의 충격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신사임당상.
지금도 여전히 잘 보존돼 있다.
당시 공포, 무서운이야기가 유행이었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한밤중에 동상이 운동장을 날아다닌다는
괴담이 아이들 사이에서 전해지기도 했었다.
본관 앞에서 촬영한 학교 정문 모습.
이순신장군 동상
이 동상들은 놀랍게도 모두 1980년대 시절
졸업생 아이의 학부모가 기증한 것이었다.
학교 본관 가운데 정문.
학교 교가가 적힌 비석이다.
최두출 작사,
박용녀 작곡의 이 교가는
모두 2절로 돼있는데,
우리 시절엔 1절만 불렀었다.
2절까지 있다는걸 아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가사 내용만큼이나
이 학교의 역사는 매우 깊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은월봉 신선저두 병풍을 삼고
태화강 흘러내려 염포옛개항
이품에 안긴강남 우리 학원은
이강산 배달정기 타고나셨네
어릴땐 이 가사에 담긴 단어를 몰랐었는데,
은월봉은 지금의 남구 남산,
"염포옛개항"은 과거 태화강 하류 울산 북구 염포동에 있는
삼포 개항지 중 하나인 염포동을 의미한다.
세종대왕 동상
이 동상도 기증한 것이다.
본관 좌측 출입문의 모습.
강남초등학교 정문 모습.
이곳엔 과거에
내가 학용품 준비물을 구입하기 위해
단골로 들렀던 문구점이 하나있었다.
주인 사장님이 아주머니셨는데
간판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름문구사였는지, 한솔문구사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이곳에서 단돈 100원으로 군것질도 하고
미니오락실에서 킹오브파이터97이나 철권 같은 게임도 했었다.
강남초등학교 앞에는 정말 많은 문구점이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사라졌다.
강남초등학교 후문.
후문 안쪽엔 운동장 펜스로 막혀져 있다.
강남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건물.
강남초등학교 뒷편의 또 다른 출입문.
예전 내가 다니던 시절엔
이 출입문을 통해 등교하는 학생들도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강남초등학교 정문 앞.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등하교 시간에 어마무시하게 많은 학생들이
차량이 진입하기 힘들정도로
다니던 곳이었다.
내가 다닐 당시만 하더라도
53회 졸업생(2001년 2월) 기준으로
한 반에 약 40여명, 한 학년에 7반까지 있었으니
한 학년에만 거의 280명 이상에 달하는 학생들이 다녔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 전부 포함하면
어림잡아도 최소 1,5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 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학생수다.
그 시절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까마득하기만 하다.
강남초등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는
건물 2층은 역도산태권도다.
실제로 나도 잠시 다녔던적 있다.
기억으론 내 초등학교 같은 졸업생 동기가
이곳 역도산태권도 사범인것으로 알고 있다.
졸업했던 내 모교 강남초등학교를
이렇게 제대로 둘러보는건 처음이었다.
2000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겨울방학이 곧 다가오던
11월이 되고
그때 당시 친절하고 상냥하셨던 원어민 영어선생님("케른"이라는 성함을 가진 선생님이셨던걸로 기억한다.)과
운동장에서 배구 체육놀이를 하며
"Bye bye~"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어수업이 완전히 종강됐을때,
이제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구나를 느꼈었다
.
8살 1학년 입학했던것도 정말 엊그제 같았는데...
전학을 한번도 가지않고
6년을 이곳 강남초등학교를 다녔었다.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을 수없이 겪었고
1학년땐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를 겪고
자주 아파서 조퇴하는 등
힘든 시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추억도 많이 남고
친구들과 재밌게 놀았던 기억들도 많이 남고,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이 아련하게나마 떠오른다.
6학년때 수학여행으로
에버랜드와 독립기념관을 갔던 추억도 떠오르고,
(불후의 명곡 이소은 - 서방님 노래를 수학여행때 관광버스에서 처음 알게되었다.)
경주에서 수련회때의 추억도 떠오른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PC방으로 달려가서
그 당시 CRT 옛 모니터를 쓰는 팬티엄 컴퓨터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했던 추억도 떠오르고
그 당시 윈도우 MS DOS를 쓰던 친구 집에 놀러가서
블루문(Bluemoon)에서 개발한 스카이로드(Skyloads)라는 고전 게임을
재미있게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스마트폰 , 태블릿PC, 휴대폰 하나 없던 때에
울산 남구 달동과 신정동의 온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친구들과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수다떨면서 놀았던 그때의 많은 추억들도 떠오른다.
초중고등학교 통틀어
내가 남녀공학을 다녔던건 강남초등학교가 유일하다.
4학년 시절과 6학년 시절 같은 반,
남몰래 짝사랑했던 여학생들도 떠오른다.
(얌전하고 청순하고 예뻤던 여학생들이었다.
그 여학생들 중 한명은 예전에 가수로 데뷔했었던것 같은데,
지금은 소식을 모른다.)
2001년 2월 졸업식때
부모님이 직접 참석해주셨고
같이 운동장에서 졸업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힘들고 박하게 보냈던 시절이지만
정말 아쉬움이 많고
한편으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순진하고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던
천진난만했던 그때가
아련하게나마 기억 속에 남는다.
그로부터 한달뒤,
현대자동차 아저씨들이 입는
현장 근무복 만큼이나
칙칙하고 어둡기만한 어색한 교복을 입고
와일드한 남학생들로 가득한
태화중학교를 다니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울산도서관 인근 야음동에 있는 태화중학교는
지금은 남녀공학이지만,
내가 다니던 2000년대 초에는
지금의 롯데마트 근처 청솔초등학교가
태화중학교가 있던 자리이며,
그때는 남학생들만 다니는 남자 단성(單性)학교였다.
더 많은 이야기를, 더 많이 담고 싶지만,
오랜 옛 시절의 내 기억을 글로써 담아내는 능력은 여기까지인것 같다.
내 방 한구석에 모셔다놓은
강남초등학교 졸업앨범(53회)의 일부를 공개하며,
어린시절 추억과 회상(回想)들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으며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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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강남초등학교 53회 졸업앨범 표지 모습
졸업앨범에 나와있는 강남초등학교 건물의 본관 옛 모습.
왼쪽 아래 2층 건물 사진이
본관 맞은편에 있던 옛 급식실과 병설유치원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 건물 뒷편으로 단풍나무들과 놀이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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