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5.(수)
방문한 곳은
울산 남구 매암동에 있는
"양죽부락 옛터비"라고 하는 비석(碑石)이 있는
애향비동산이다.
이곳에 방문하게 된 이유는
예전에 매암동(장생포고래로) 방면에 있던
수출포장 회사에 다녔던 적이 있는데,
'양죽마을'이라는 버스정류장을
출퇴근하며 지나치는 과정에서
무심코 시내버스 창밖으로
보통 매암동에 있는 흔한 공장이 아닌
서로 다른 크기의 비석 4개와 대나무들이 수놓여져 있는 것을
우연찮게 봤었기 때문이다.
매암동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모습이 신기하였고
나중에 시간되면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때마침 내일 이직하는 다른 회사 출근을 앞두고
오늘 시간이 남아 방문하게 되었다.
장생포와 매암동 방면의 회사를 다니거나
장생포고래박물관, 장생포고래문화마을, 장생포문화창고 등을
방문하기 위해 시내버스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양죽마을"이라는 버스정류장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후성 바로 인근에 있는 곳으로
과거 국가미포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양죽마을이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다.
사실 이곳 매암동은
일제강점기 당시까지만 하여도
매호동, 양죽동, 교암동, 대일동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매암동은 과거엔 매암리였다.)
각기 지명이 붙여진 마을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양죽마을이다.
참고로 "대일동(大日洞)"이라는 대일마을은
"대일"이라는 옛지명이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1910년대생)와 아버지께서(1944년생)
옛 대일에서 거주하셨었다.
대일이라는 곳은 정확하진 않지만
내 어릴적 들었던 기억이 맞다면
양죽마을 근처에 있는
울산대교 건너편, 지금의 삼양사 울산1공장 앞 철도가 있던 자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대일에 거주하셨던 아버지께서도
삼양사 울산공장 앞 철도있는 쪽이
대일이었다고 말씀하셨었다.
아버지께선 대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고,
장생포국민학교(장생포초등학교)를 다니셨었다.
할아버지께선 내가 태어나기 1년 전(1980년대 후반)에 돌아가셨고,
아버지께서 거주하셨던 옛 대일에 있던
1층 규모의 작은 주택은
모두 철거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주변에 있던 모든 주택들도 없어졌다.)
그 당시 대일의 모습 사진을 아버지께서
사진촬영해 두셨던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우리 집에 그때의 사진들을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의 매암동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은
야음장생포동이다.
매암동은 주민이 거의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양죽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울산대교,
울산대교의 그 아래에 있는 양죽마루 정자와
애기목이 있는 옛 당수나무터이다.
이곳 도로 건너편에 양죽부락 옛터비가 있다.
양죽부락 옛터비에서 바라본
울산대교와 장생포로 큰도로의 모습이다.
과거 수십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양죽마을과 대일마을 등
사람이 살던 곳이었는지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양죽부락 옛터비는 (주)천사교통 바로 앞에 있다.
비석터가 있는 바로 옆에는
옛 고개만당길을 안내하는 비석도 있다.
장생포가는길로 안내돼 있는 도로이다.
들어가면 마을 대신 공장들만 나오다가
장생포고래문화마을 쪽으로 도착한다.
양죽부락 옛터비의 전체 모습이다.
비석은 모두 4개로 구성돼 있는
작은 터로 조성돼 있다.
아마 장생포와 매암동 쪽으로 지나가는 직장인이나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 비석을 무심코 봤을 것이다.
양죽부락 옛터비 4개 비석 중에서
가장 작은 비석이다.
매암동에 있는 옛 고향길의 지명들이 모두 표시돼 있다.
비석 주변을 동영상으로 상세히 촬영해 보았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거주하셨던
"대일"이라는 지명도 뒷편에 있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어붕개"라는 지명이 적혀있었다.
나머지 거대한 3개 비석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터가 넓은 편이었다.
양죽부락 옛터비라 적혀있다.
부락은 다른 말로 하면 "촌락(村落)"이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이해하면 된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크게 발달되지 않던 옛 시절에는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어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형성돼
옹기종기 어울려 살았었다.
요즘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굴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엔 옆집 이웃들의 얼굴은 물론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황을
대화와 소통 등 물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훤하게 알고 있었기에
인터넷이 없었음에도 나름 서로간의 정보를 공유하던 시절이었다.
4개 비석 중에는
"그리운 고향, 양죽"이라는 시가 쓰여져 있다.
서태일 시인이 썼다고 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음을 붉디 붉은 꽃
사철 푸른잎 그늘 키우며
늘 그곳에 있는 동백처럼
고향 양죽에 있다
쏟아지는 별들과 은하수에 꿈 실린 여름밤
동대산 무등실 보름달에 소원 빌던 쥐불놀이
고개만당 넘어 경골새로 들어서면
위엄스런 자태로 언제나 반겨주던
마을 수호신 포구나무
조그만 열매 불게 익어 터질 때
고향도 추억도 함께 터진다
아....
그리운 고향, 양죽
여기서 말하는
마을 수호신 포구나무는건너편에 있는 옛 당수나무터를 말하는것 같다.1991년 8월 제 12호 태풍 글래디스(글라디스)의 영향으로고사된 것으로 보인다.(옛 당수나무터 비석 내용 참조함)
비석에 있는 큰 한자어는
삼죽지향(三竹之鄕)이라 쓰여져 있다.
삼죽지향(三竹之鄕) 비석에도
양죽마을 옛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望鄕)의 의미가 담겨있는것 같다.
애향비 조성공사 추진내역에 대해서도
비석 아래에 기재돼 있었다.
2008년 10월 25일 발기인총회를 열고
"양죽향우회"에서 2010년 12월 5일 공사를 완료했다고 한다.
양죽부락 옛터비는
조성된지 약 13년 정도 된 것이다.
현재의 대원레미콘 자리에
600년 이상 자생했던 포구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1991년 태풍 글래디스로 인해 고사되어 지금은 사라짐)
천사교통이라는 회사 바로 앞에 양죽부락 옛터비가 있다.
비석 뒤에서도 촬영해 보았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거주하셨던
"대일"이라는 지명도 선명하게 기재돼 있다.
지금은 공장밖에 없는
울산 남구 매암동의
양죽마을과 대일마을 등
옛 촌락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며, 세월이 흐르며
점차 사라질 것 같다.
세월의 흐름과 공업화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젠 옛 사진들과 비석으로만
남겨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음으로
바로 건너편에 있는
양죽마루와 옛 당수나무터에 가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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