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울산광역시 남구

울산 산재희생자 위령탑 (蔚山 産災犧牲者 慰靈塔)

울산노총각 2025. 5. 2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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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공원 동문 소녀상 맞은편에 최근에 세워진 탑이 있다.
"울산 산재희생자 위령탑 (蔚山 産災犧牲者 慰靈塔)"이다.
 
얼마전에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이번에 준공된 것 같다.
 
울산이 1960년대 공업센터로 지정된 이후 반세기 동안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비철금속 등 대한민국의 2차 산업(제조업) 대동맥의 중심을 이끌어오며 수 많은 공장들이 쉴새없이 가동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안전사고 등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근로자들도 많았다.
 
이 위령탑은 울산의 산업현장에서 근무하다 재해사고로 목숨을 잃은 근로자들의 조의(弔儀)를 표하기 위해 세워졌다.
 
참고로 내가 첫 직장으로 관리부에 입사해서 근무했던 울산 남구 소재 미포국가산업단지 내에 있는 중소기업에서도 오랫동안 근무했던 직원 한분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던적이 있다. 벌써 10여년전의 일이다. 아내분이 외국인이셨고, 어린 자녀들을 둔 채 세상을 떠나셨었다. 그 당시 입사한지 고작 1년 정도 밖에 안된 말단사원이었던 나는 산재 사망사고를 처음 접하게 되어 수습에 어려움이 많았고, 이제 막 관리부장으로 부임하셨던(실제론 기존 관리부장이 퇴사하여 다른 부서에서 본의아니게 관리부장을 맡으시게 된) 직장상사와 울산 중구에 있는 한 종합병원 장례식장에서 사고를 수습하는데 몇일을 고생했었다. 입관식까지 참여했었다.
 
관리부 말단사원이었던 나는 첫직장에서 불과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근무했지만, 2년이라는 기간이 10년이나 느껴질만큼 너무도 힘들었던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빨리 퇴사하길 잘한단 생각이 든다. 얼마전 우연히 밖에서 만나뵙게된 전 직장상사로부터 들은 얘기론 요즘 그 회사는 직원들 대부분 이미 다 떠나고 겨우 몇명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상습적으로 임금체불하고, 회사 어렵다며 기존의 있는 직원들은 자꾸 내보내려 하고, 그러다보니 자꾸만 일을 떠넘기는 아무런 체계 없는 질 나쁜 회사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고, 무엇보다 사장님을 포함해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질이 너무 나빴기 때문이다.(물론 좋은 사람들도 몇몇 계셨지만, 안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중소기업은 아웃소싱과 마찬가지로 이력서만 넣으면 누구나 들어가는게 어렵지않고 진입장벽이 낮다 보니 온갖 인간군상들이 다 모여있어서 그런것 같다.)
 
"중소기업"의 민낯과 열악한 근무환경 실태는 첫 직장에서 모두 경험했었다. 그야말로 무간지옥 그 자체였다. 만약 내가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모든 민낯을 적나라하게 얘기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팔만대장경급으로 반나절 시간을 할애해 모두 말할 자신이 있을 만큼 현장의 많은 업종에서 일해보며 직접 몸소 겪었던 중소기업의 실태들을 말할 자신이 있다. 그 정도로 나는 지난 10여년간 울산의 수 많은 업종(조선소를 제외하곤 안해본 일이 거의 없었던것 같다.)의 중소기업들과 아웃소싱 등 하청업체, 그리고 계약직들을 다니며 몸소 겪어봤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직장을 평생 꾸준히 다녀지 못한 내 자신이 한편으론 부끄럽지만 그래도 내 고향 울산에서 이 회사 저 회사 다니며 나름의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유튜브에서 울산의 청년들이 울산을 떠난다며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들이 있던데, 같은 젊은 세대로써 충분히 이해가 간다. 당장 워크넷 고용24에서 울산지역 구인공고만 봐도 왜 청년들이 떠날 수 밖에 없는지 쉽게 답이 나온다.)
 
나는 첫 직장에서 현장직이 아닌 관리부 사무직으로 근무했었다. 그 때 당시 관리부 직원 1명을 모집하는데, 이력서를 100명이 넘게 지원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었던것 같다. 취업이 매우 극심했던 2010년대에 오죽했으면 내 또래 나이의 여학생들이(지금은 30대) "취집"을 하고 싶다며 뉴스에 나와 직접 인터뷰를 했을 정도였다. 학과 수석을 하며 장학금을 받고있던 대학생시절, 등록금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무작정 한학기를 단축하여 조기졸업 후(코스모스 졸업) 취업한 곳은 어디 이름모를 말단 하청 중소기업이었다.("협력업체"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곳) 부서는 관리부였다. 내 전공(경영학과)과 비슷한 것 같단 생각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아무것도 모른채 막연히 입사했었다. 이후 이곳에 모든것을 쓰기 어렵지만 내가 첫 직장으로 근무했던 중소기업은 그야말로 3D 업종의 무간지옥 그 자체였다. 정말 어디가서 남들에게 말하기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할 만큼 중소기업의 온갖 민낯의 실태를 목도할 수 있던 회사였다. 평생 대기업 공기업 중견기업 공공기관 등 건실한 직장만 다니는 사람들이 중소기업의 이런 적나라한 현실을 보게된다면, 아마 지금 회사가 얼마나 천국같은 곳인지 알게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대기업에서 노동조합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이유도 아니고 왜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지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월급이 제 날짜에 제때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회사인지 모르는것 같다. 게다가 복지포인트며, 자녀학자금이며, 맛있고 질좋은 구내식당 밥이며, 중소기업에선 절대로 상상해볼 수조차 없는 복리후생을 모두 누리면서 말이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중소기업들은 형식상 법인일뿐, 실제론 가족회사다. 실상 영리법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대부분 한 집안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 산업체인턴으로 처음 "회사"라는 곳에서 근무했던 북구 효문공단에 있는 어느 회사도 아들이 임원으로 있는 가족회사였다.(지금은 규모가 더 커졌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나 직장상사가 알고보니 사장님의 가족일수도 있고, 사장님의 친인척일수도 있다. 산소호흡기만 겨우 달고사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열악한 중소기업들도 많다. 내가 다니던 첫 직장 중소기업(속되게 표현하면 "X소기업")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경기를 타며 잠시 성장했었고, 직원들도 한때는 50명 이상까지 늘어났었다. (일용근로자들 포함해 최소 80명 이상까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무리한 투자와 자꾸만 어딘가 새어나가는 자금(진짜 할많하않...)과 부실한 재무상황은 결국 거래처 대금지급이 지연되고 그 피해는 직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며 상습적인 임금체불을 초래했다. 대책없이 무리하게 회사를 경영한 사장님의 책임이 가장 큰데도 직원들을 내보내려 하기 바빴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회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간관리자(관리부장)를 사장님이 대책없이 모두 내보내버리고는 경력이 짧은 말단 사원들(나를 포함한 경리 여직원)에게 주요 업무를 모두 떠넘겼으니, 그 과정에서 당연히 실수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경리 여직원 누나들 2명 중 1명은 이직을 하며 도망치듯 떠나셨고, 다른 1명은 결혼하고 바로 그만두셨다. 회사 생활에 오죽 현타가 왔으면 "결혼하고 집에서 맘편히 아이 키우며 살고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장님은 그 실수들을 모두 내 책임이라고 했다. 그런 몇가지의 책임들을 꼬집어내며 "너 때문에 회사가 손해가 생겼다. 기한 줄테니 다른 회사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이 시점이 다른 부서에 있는 직원분이 관리부장으로 이제 막 부임하던 시점이었다.(사실 관리부에 대한 업무 경험이 전혀 없으셨던 분이셨다.) 서울 공덕역에 있는 지사 사무실도 혼자서 온갖 생고생 막노동을 하며 겨우 철수했었고, 현장 직원들의 감정쓰레기통에 욕받이로 회사 생활하는건 일상이 되었고, 골프스케줄 제대로 못맞췄다며 사장님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는 폭행을 당했음에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고,(골프스케줄 업무도 원래는 비서 여직원 누나가 맡던 업무였는데, 사장님이 내보내면서 나한테 인수인계도 안하고 퇴사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해보니 비서 여직원이 내 책상위에 인수인계서 파일만 덩그러니 올려놓고 그냥 가버렸던 것이다. 정말 속상했다. 사장도 싫었지만 뒷통수치고 나간 비서 여직원도 너무 밉고 싫었다.) 현장에 사람이 없다며 현장지원 해달라고 해서 같이 일을 도와드렸더니 제대로 일을 못한다고 발길질하며 폭행하는 현장 직원에게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으며, 임금체불에 상여금이 상당부분 삭감되어도 회사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온갖 맘고생을 다했던 나에게 사장님으로부터 받은건 결국 "해고"였다. 단지 순진하고 착하게 보이는 나를 사람들이 이렇게 나쁘게 이용하고 막대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이제 "중소기업"이라고 하면 학을 떼고 싶을 정도다. 이런 중소기업을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 누가 가려고 할까. 과연 지금 세대, 다음 세대가 중소기업에 들어가려고 할까. 뿌리산업 육성이니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니 이름만 요란스러운 이런 정책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다녔던 첫직장도 현장 국내 근로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다국적 외국인근로자들로 점점 채워져나갔다. 최저시급에 열악한 근무환경, 노후화된 시설,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중소기업에서 내 열정과 시간과 인생을 쏟으면서까지 일할 이유는 없다. 연애도 고사하고 결혼도 할수 없다. 받는 월급이 적으니 할수 있는게 없다. 중소기업 기피는 아주 당연한 현상이다. 뿌리산업 육성이니 직업자활이니 일자리 정책을 주관하며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리는 사람들이 외국인근로자들 많은 중소기업에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일 안하냐고 닥달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중소기업이 처한 현실을 너무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제발 한달만 중소기업에 입사해서 현장에서 근무해보고 그런 소릴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언제 재해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열악한 현장에서 방청유 등 요상한 현장 냄새를 맡으며 무거운 박스와 카트들이 진열된 자재 피딩도 직접해보고,  2시간 동안 입식으로 라인타며 근무하고 쉬는시간 10분을 휴게실에 겨우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며 잠깐 숨돌리고 다시 라인에 들어가서 일해야하고, 잔업 특근하려니 몸이 고되고, 안하면 돈 많이 못받는 그런 근무환경에서 한번 버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적어도 외국인근로자들이 일하는 중소기업 현장에 일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일하라고 감히 말하지는 못한다.
 
솔직히 그날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장 사직서를 바로 쓰고 뒤도 안보고 퇴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이라 어리숙했던 나를 동생처럼 잘 대해주던 친절한 경리 여직원 누나를 포함한 몇몇 마음씨 따뜻하고 좋은 직원들이 눈에 보여 차마 바로 퇴사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2년 가까이 근무했던 짧고도 길었던 관리부 사무직, 총무 일을 맡았던 내 인생의 첫 직장이었기에 미운 정(情)도 정(情)이라고. 회사를 바로 떠날수는 없었다. 인수인계는 확실히하고 입사 2년을 채우고 퇴사해야겠다는 생각에 밤을 새가며 10여페이지 분량이 넘는 인수인계서를 만들었다.(관리부에서 인사총무 일을 담당했기에 필수적으로 해야할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았다.) 이후 신규채용과 퇴사 계획까지 모두 만들어 새로 부임하신 관리부장님께 보고하였다. 관리부장님은 퇴사 약 2달 정도 앞둔 나의 사직서와 인수인계서를 보며 "기가 막힌 일"이라며 허탈해 하셨고, 내가 퇴사하는것을 관리부장님은 원하지 않으셨으나, 사장님의 방침에 따라 진행하게 되었으니 딱히 나를 붙잡을 방도는 없으셨다. 솔직히 나도 더 이상은 있고 싶지 않았다. 결재 올린 사직서는 사장님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결재 사인을하여 재가되었고, (이때 사장님은 내가 "권고사직"이 아닌 "의원사직"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하셨다고 한다.) 후임자로는 내가 입사했을 당시 나의 선임 직원이셨던 형님이 퇴사해서 다른 회사에 근무하다 다시 이곳에 재입사하며 관리부 일을 맡게 되셨다.
 
여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장님을 포함한 여러 직원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감정쓰레기통이었고, 분풀이 대상이었던것 같다.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은 회사 직원의 본인상을 비서여직원이 거래처까지 포함해 단체 안내문자를 보냈는데,(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 고객사를 포함한 거래처에서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산부 반장은 "왜 사망한 우리 회사 직원의 부고장을 보내냐"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언성을 높이며 고함치고 폭언을 하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나에게 사무실에 찾아와 갈굼과 괴롭힘을 일삼던 다른 부서 직원도 있었고,(나보다 몇살 많은 형이었는데, 학창시절에 애들 많이 패고 다녔을 것 같은 한 눈에봐도 양아치 같은 관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진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쎈 사람이었다.) 모든걸 다 나열하면 정말 끝도 없지만, 나는 이곳에서 같이 일하는 몇몇 직원들과 사장님이 참 밉고 싫었고, 속상한 일도 많이 겪었었다. 한 직장을 진득하게 버티지 못하는 내 자신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회사에서는 일도 힘들고,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힘들어 여러 직장들을 다니다 퇴사했던것 같다. 마음씨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고, 좋은 근무환경과 체계적인 시스템에서 맘편히 맘껏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직장은 거의 없을 뿐더러 대부분 대기업 공기업 공공기관 정출연일테니 진입장벽이 아주 높다는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나는 회사 운이 참 없는 것 같다. 이는 내 능력 부족이니 어쩔 수 없는것 같다.
 
내가 첫 직장으로 다녔던 곳을 포함해 대부분의 회사들은 남자직원이 무려 90%가 넘는 남초회사였다. 공업도시 울산 답게 제조업은 위험하고 힘든 일들이 많아 대부분 남자들이 현장에서 일을 한다. 남초직장의 가장 큰 단점은 군대도 마찬가지겠지만 누구 하나 만만한 상대가 있으면 대놓고 괴롭히고 꼰대짓을 하며, 심할 경우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고함치고 폭언하는 일들이 정말 많이 일어난다. 남자들은 상대 이성(여성)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반면, 같은 남자끼리는 존중과 배려, 관용이 없으며, 상대 남자를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게 바로 남초직장의 특징이다.

남초직장에서만 꼭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고, 일례로 여성들도 많이 일하는 울산의 어느 대형마트 온라인몰에서 내가 기간제 직원(스태프)으로 근무했을 당시 관리자 남자직원과 계약직 남자직원들은 20대 젊은 여성 스태프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좋은 말투로 응대했던 반면, 나에게는 별다른 이유없이 기본적인 인사도 무시하는건 물론 모르는걸 물어보면 무성의하고 불친절하고 까칠하게 대답 했었다. 일부 남자직원은 내가 일을 잘 못하면 막말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몇몇 남자직원들과 나한테 막대하고 감정이 롤러코스트처럼 왔다갔다하는 다혈질 성격가진 일부 여사님들(내가 일하던 마트에선 나이 많은 여직원들은 여사님이라 불렀다.) 때문에 큰 상처를 받고 원래 6개월 계약직이었던 스태프 일을 4개월만 하고 그만뒀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20대 젊은 여성 스태프들에게는 부드럽고 좋게 대하는 반면, 같은 남자 스태프한텐(특히 만만해보이는 남자 스태프한텐) 거칠대 대하고 막말하기도 했다. 남초사회는 그야말로 "남적남"이라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게하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기는 커녕, 쉽게 보고 막대하는 질 나쁜 남자직원들이 남초직장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본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상대 남자직원을 공격하기도 한다.(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원래 옳은 말은 귀가 아프고,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인데, 이런 남자들은 귀가 아픈 옳은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되려 자신을 무시한다며 추후에 보복을 하는 경우도 있다.
 
데이트폭력에서 가해자가 남자들이 훨씬 더 많은 이유는 상대 이성(여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부재돼있고,(대부분의 연애 관계가 그렇듯, 주로 남성이 여성을 리드하고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반면, 여성은 대개 수동적인 연애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대 이성의 쓴소리는 귀가 아픈 옳은 말이거나 헤어지자는 말을 경청하며 받아들이고 개선하지 못한채 되려 분노를 품고 보복이라는 폭력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보복 범죄가 유독 남자들이 많이 저지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연애 수요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신을 리드할 줄 아는 알파메일 남성을 원하며,(학창시절 애들 잘 때리고 잘 싸우던 남자들이 보통 연애도 잘하고 결혼도 빨리한다.) 그에 반해 소심하고 수동적인 베타메일 남성은 별로 매력이 없다고 느끼기에 연애 수요가 없다.(설사 이런 유형의 남성들이 용기내어 애프터를 하면 여성들은 만나고 싶지 않다며 거절한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에 기인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항상 겪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데이트폭력의 피해는 늘 상존해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강력한 형사처벌만이 정답은 아니다. 사랑의 영역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맞바꿀만큼 강력한 신념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되려 범죄 예방효과라는 형법의 본래 취지와는 전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남초직장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이런 점들이라 할 수 있다. 남중 남고 군대에서 각종 폭력 사고가 유독 많이 일어나는 것도 남초직장 특유의 와일드하고 거친 분위기 때문이다. 남중 남고 군대에서 농구 등 여러 체육활동을 시키는것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동량많고 공격적인 남성의 본능을 운동을 통해 발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여초직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남초직장도 결코 덜하진 않다.(결론 : 한쪽 성비가 너무 지나치게 많은 조직은 항상 문제가 생긴다.)
 

 
울산광역시에서 직접 세운 위령탑이었다.

 
위령탑의 조형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는지 상세하게 설명된 내용이 없어서 아쉬웠다.

글을 적다보니 20대 갓 스물다섯이던 사회초년생 시절, 열악하고 힘들었던 첫 직장 중소기업을 다녔던 그때 일이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보며 생생하게 떠오르는것 같다. 미웠고 싫었던 질 나쁜 그 회사에 대한 기억은 추억으로 아련하게 남는다. 지금도 미포산업단지에 들를 일이 있을때 그 회사의 공장 앞을 가끔 지나가보곤 한다.

울산 산재희생자 위령탑을 둘러보며, 10여년전 나의 첫 직장이었던 미포국가산업단지의 한 이름모를 중소기업 공장에서 열악하고 힘든 근무환경 속에 가족들과 직원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회사를 위해 일하셨음에도 불의의 산재사고를 당해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둔채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다투다 끝내 고인이 되신 직원분(존함은 아직도 기억나지만 차마 이곳에 쓸수는 없을것 같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이 위령탑을 통해 고인분과 그의 유가족분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끝.
 

2025년 5월 24일 토요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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