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울산 남구 매암동에 있는
"양죽부락 옛터비" 망향비동산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동안 우리집 장롱속에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사진첩을 꺼내보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두분 모두 1910년대 출생하셨다.)와
아버지(1944년생으로 울산 남구의 산업화 과도기를 모두 겪으셨던 산증인, 토박이시다.)께서
과거 이곳 울산 남구 매암동 대일(大日)에서
마을이 철거되기 이전까지
약 30여년을 오랫동안 거주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선 젊은시절
옛 동양나이론(지금의 효성) 현장직에 근무하시면서
틈틈이 필름카메라로 사진촬영 하는것이 취미셨기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매암동의 옛 모습들이
비록 몇 장밖에 없는 사진이지만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스캐너가 없는 관계로
휴대폰 카메라로 옛 원본 사진들을
하나씩 선명하게 촬영하였다.
이 사진들이
이제 더이상은 볼 수 없는
울산의 옛 모습으로 남겨지게 될줄은 몰랐다.
그 사진들을 꺼내어
이곳 인터넷 블로그에 공개하기로 하였다.
아버지의 30~40여년 전, 젊은시절 모습의 초상권 사용은
아버지로부터 구두상의 동의를 직접얻었다.
어쩌면 이곳 사라진 매암동 일대에 거주하셨던 주민분이나
그 주민의 자손분께서
우연찮게 이 블로그 글을 본다면
기억의 망각속에서 어렴풋이 옛 매암동 마을 모습을
떠오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직접 공개하게 된 이유는
산업화라는 과도기를 겪고 있는
울산의 옛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지역향토사의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세대는 물론,
다음 후손세대에까지
울산 남구 매암동의 옛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무심코 지나치는 울산의 미포산업단지의
퀘퀘한 냄새가 가득한 수 많은 공장들은
과거 한때 많은 주민들이 촌락을 이루며 거주하던 곳이었음을
참조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과거 울산 남구 매암동 일대에는
매호, 교암, 대일, 양죽마을이 존재하여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점차 울산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매암동을 포함하여 여천동, 장생포동 등에
공장이 하나둘 입주하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쯤부터
이곳 매암동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는
실향(失鄕)을 겪게되었다.
매암동 일대의 마을과 주택,
여러 시설물들,
그리고 나름의 명칭을 갖고 있던 여러 토착 지명과 도로들은
모두 철거되어 그 자리엔 공장이 들어서 있으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매암동(梅岩洞)은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에 속하여
삼양사, 한온시스템, 팜한농, 미원화학, 송원산업,
모빌코리아윤활유와 쌍용양회,
그리고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 등
울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굴지의 기업들이 많이 입주하고 있으며,
2차산업 중축(中軸)의 대동맥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경제성장과 산업화라는 국가적 숙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매암동 일대에 거주하던
매호, 교암, 대일, 양죽마을의 옛 주민들은
지금쯤 같은 하늘 아래,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대부분 오래 전 마을을 떠나셨기 때문에
수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현재까지 생존하고 계신 산증인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나의 아버지 이외에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매암동을 포함하여
울산 남구의 미포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 이주민들을 위한
남구 성암동에 조성된 미포산단 이주민 망향탑,
(롯데케미칼 울산2공장 옆, 울산 남구 성암동 산 17 소재)
그리고 남구 매암동에 있는 양죽부락 옛터비만
(울산 남구 매암동 116-5 소재)
남아서 옛 고향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위 사진은 울산 남구 매암동,
대일(大日) 마을의 옛 모습이다.
사진은 1980년대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아버지께서 직접 촬영하셨다.)
양죽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사진에서 바로 왼쪽편 주택이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큰아버지(아버지의 첫째형, 백부님), 둘째큰아버지(아버지의 둘째형, 중부님), 아버지,
그리고 고모께서 거주하셨던 주택이다.
사진 한가운데 주택 미닫이문 옆에 있는 벽에
'김봉기'라고 흰색으로 크게 주기돼 있는데,
바로 나의 할아버지 존함이다.
대일마을 뒷편으로
가운데 알록달록한 색깔을 가진
원통형 3개가 보이는 공장은
쌍용양회이며,
오른쪽에 깔대기가 여러개 있는 구축물은
옛 한라레미콘 공장이다. (現 한라엔컴 울산사업소)
그리고 깔대기 구축물 바로 맞은편 왼쪽에
허허벌판처럼 보이는 곳은
지금의 팜한농 비료공장 부지로 보인다.
대일(大日) 마을의 정확한 위치는
위 사진으로 대략적인 유추가 가능한데,
지금의 삼양사 울산1공장과
울산항역, 울산항선 철도,
울산대교로 이제 막 진입하기 시작하는 고가도로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교량이 있는 곳까지 해당한다.
이곳 대일마을에 거주하셨던 할아버지께선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에(1980년대 후반)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할머니께선 내가 10살되던 쯤(1990년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산업화 이전 울산은 보릿고개를 겪던
엄청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아버지께선 지금도 자신은 불효자식이었다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제대로 보살펴 드리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매암동 대일마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거주하셨던,
아버지께서 어린시절을 보내셨던 옛 생가(生家)의 모습이다.
사진은 1980년대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슈퍼마켓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가게는
아버지께 여쭤본 결과
과자, 음료, 담배 등 물건을 팔던 곳으로
할아버지께서 직접 운영하셨다고 한다.
구멍가게 간판이름은 따로 없었다고 한다.
주택과 구멍가게 모두 아버지 생가였던 셈이다.
대일마을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거주하셨던
주택 내부 모습이다.
아버지께선 조그만한 이곳 주택에서
공부를 하셨고, 울산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셨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셨고,
바로 취업하셨다고 한다.
지금처럼 공장이 별로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공장에 취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필기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합격자 명단 중 아버지의 성함 석 자가
신문사 기업광고 지면에 실려나왔었다고 한다.
(인터넷이 없던 그시절엔 기업체 합격자명단이 신문사 광고를 통해 소개되던 시절이었다.)
이후 아버지께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지금의 내 나이(30대 중후반)보다 더 어린 시절에
반장 직급까지 고속 승진하셨었다고 한다.
(반면 아들인 나는 형편없는 상황이다.)
대일마을의 모습(다른 사진)이다.
사진앨범 왼쪽에 아버지께서 수기로 기록해두신 것이다.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대일(大日)!
나의 고향
나의 집
이곳에서 30년이 넘도록 살았던 집이여!
생가(生家)가 그립다.
형수가 포즈를 취하고...
형수님은
나의 큰어머님(백모님)을 말한다.
큰어머님의 젊은 시절 모습도 사진에 담겨져 있었다.
나의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아버지 생가에서 촬영하셨다.
대일마을이 철거되기 전에 촬영된 것으로
사진에 날짜는 나와있지 않지만
1980년대(아버지께서 40대였던 시절)가 아닐까 생각된다.
동양나이론(지금의 효성) 현장직으로
늘 퀘퀘한 냄새의 작업복을 입고
불철주야 교대근무하셨던 아버지께선
퇴근하고 회사 밖에선
양복에 넥타이를 입고, 구두 신는 것을 좋아하셨다.
(반면 나는 양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첩에는 아버지께선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다.
나의 생가!
큰방 문짝, 작은방 문짝
어머님이 늘 닦고 쓸던 마루바닥.
어머님은 항시 새벽녘에 일어나 마루를 흠치면서
"얘들아, 날이 샜다. 일어나라."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은은히 들려오는 것 같구나.
철거된 아버지의 옛 생가(生家)의 모습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께서 거주하셨던 옛 생가(生家)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일마을이 있던 그 자리엔
삼양사 울산1공장과 울산항선 철도가 들어서고
장생포로 큰 도로가 확장되고
거대한 울산대교도 들어서있다.
이곳에 정말 주민들이 살았단걸까 싶을 만큼
대일마을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할아버지의 옛 생가가 있었던
철거된 대일마을에서.
아버지와 함께 쌍용양회와 한라레미콘 공장을 뒷배경으로
촬영하였다.
이때가 1990년대 초중반쯤이었던것 같다.
대일마을 옛 할아버지 생가의 뜰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촬영시점은 1960년대~1970년대로 추정된다.
사진 오른쪽부터
고모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둘째큰아버지(중부님)
아버지의 옛 생가 모습이다.
아버지의 옛 생가, 측면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께선 이곳에서 어린시절 힘들게 보내며
장생포국민학교와 대현중학교를 거쳐
울산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다니셨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엔 형편이 어려워 점심밥이 없어
식수대에서 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한적도 많았다고 한다.
울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실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대일마을 옛 생가(生家) 뜰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모습이다.
대일마을 골목길에서.
아버지의 젊은시절 모습이다.
이 사진도 1970년대~1980년대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내 나이(30대)쯤 되던 시절이셨을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의 옛 매암동 마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점차 사라질 것이다.
비록 몇 장 안되는 사진이지만,
6.25 한국전쟁 휴전 이후
격변의 시대에
울산 산업화의 과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지역향토사를 통해
다음 후손세대들에게도
울산 남구의 옛 뿌리를 가르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길 기대해보며
글을 마친다.
(추가)
대일마을의 옛 모습 사진들을
공공도서관 스캐너를 이용하여
선명한 사진파일을 추가로 업로드하였다.
아래는 스캐너로 스캔한 사진들이다.
#매암동 #울산향토사 #울산남구매암동 #양죽마을 #대일마을 #대일 #大日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 #울산옛모습 #울산옛사진 #울산남구옛모습 #울산남구옛사진 #울산과거모습 #울산산업화모습 #1980년대울산 #이주민망향탑 #망향비 #망향탑 #애향비
'여행 이야기 > 울산광역시 남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경박사 장재연 바다생물 이야기 - 바다생물 사진展 (장생포초등학교) (0) | 2023.11.05 |
---|---|
울산 남구 청소년 진로직업체험센터(차오름센터)에서 (0) | 2023.11.05 |
울산 남구 여천동 울산항선, 여천1건널목에서 (2) | 2023.10.24 |
2023 올해의 작가 개인展 5부 전시회 관람후기 (울산문화예술회관) (0) | 2023.10.24 |
꿈꾸는 청년, 울산展 청년작가 연합전시회 관람 후기 (장생포 문화창고) (0) | 2023.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