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고 숫기가 없는 노총각,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선을 보다
2025년 5월 3일 토요일.
태어나서 맞선이란걸 처음 봤다. 물론 몇년전에도 자격증을 한창 공부하고 있던 백수시절 맞선자리 비슷한 곳에 한번 나간 적은 있었지만,(사실상 아버지 등쌀에 떠밀려... 원치않게 나갔던 자리라 맞선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이번은 어머님들끼리 주선해서 나가는 선자리였다. 처음 제의를 받은건 일주일전인 4월 말 쯤이었다. 내가 들었던 정보라곤 어머님 친구분 따님(일명 '엄친딸')이 나와 같은 30대라는 점과 울산에서 제법 큰 규모의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점. 2가지 뿐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4월 말. 상대 여성의 연락처와 내 연락처를 어머님들 통해 서로 주고 받았는데, 여성분이 나에게 카톡으로 먼저 연락이 왔다. 자신도 어머님을 통해 연락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먼저 운을 띄워 얘길하며,(이때부터 상대 여성도 딱히 맞선을 볼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우선 당장 바로 만나긴 어려우니 다음주에 보자고 말하셨다. 나도 알겠다고 답장했다.
5월 3일 토요일을 앞둔 전날 금요일. 공백이 일주일 가까이 되었고 그간 서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전날 하루를 앞두고 서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나는 대체 어떻게 먼저 연락해야하나, 멘트를 쓰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차라리 같은 동성 남자면 그냥 연락을 해도 되겠지만, 상대는 여성이다보니 어떻게 연락을 해야할지 몰랐다. 사실 나는 알고지내는 또래 여성이(여사친이) 단 한명도 없었기에 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약속일자는 5월 3일 토요일로 잡았지만, 구체적으로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볼지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못했다. 사실상 기약없는 약속이다. 퇴근하고 금요일 늦은 저녁 조심스럽게 카톡으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끝에 상대 여성분께 멘트를 보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다행히 상대 여성분이 나에게 답장을 주셨다. 처음 만나기로 정한 장소는 토요일 오후 2시 선암호수공원 해월당. 커피 마시고 나면 같이 선암호수공원 산책도 하자고 하셨다. 나는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날 비가 오니 조심히 와달라고 말씀드렸다. 여성분이 그날 날씨가 비오는 줄은 몰랐다며 장소를 다시 바꾸면 안되겠냐고 하셨다. 여성분이 내가 살고 있는 근처 공업탑 인근에 있는 대형브랜드 카페로 먼저 약속장소를 잡아주셨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한 내 모습을 카톡 멘트만으로도 상대 여성이 어느 정도 눈치 채셨는지 만날 장소도 먼저 정해주시고, 친절하게도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카페를 약속장소로 잡아주셨다. 나는 내가 먼저 약속장소를 잡아줄만큼의 센스는 없었다.
추적추적 장대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는 2025년 5월 3일 토요일 당일 오후 1시 30분. 나는 약속장소에 미리 카페에 도착했다. 30분이라는 시간이 어찌나 긴장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여성의 외모도 모르고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후 2시쯤 되니 여성분이 나에게 카톡으로 카페 안에 어디 계시냐고 연락이 왔다. "계단 아랫쪽에 있는 좌석에 앉아있어요"라고 답장했다. 조금 지나서 여성분이 나에게 다가오며 인사해주셨다. 안경을 쓴 평범한 외모의 귀여운 인상을 가진 분이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개인자가용을 타고 먼길에 내가 사는 동네까지 오셨다고 한다.(내가 여성분이 살고 있는 동네쪽으로 가도 되는데... 이때 좀 미안했었다.) 여성분은 본인이 먼저 "여긴 어두침침한데 밝은 쪽 좌석으로 가면 안되겠냐"고 하셨다. 나는 떨리는 마음에 얼떨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커피도 더치페이로 계산했다. 내가 돈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제가 가서 계산해드릴게요"라고 먼저 말할 용기는 그 순간에 나지 않았다. 낯을 많이 가리고 숫기없고 자신감없는 내 모습이 상대 여성의 눈에 너무 쉽게 띄었나 보다. 여성분도 눈치채셨는지 본인이 직접 카운터에 가서 자신이 마실 커피를 계산하셨다.
대화는 2시간 정도 길게 했던것 같다. 밖에 비가 많이 오고있었기에 어딜 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러가지 많은 대화를 했던것 같다. 나와 같은 30대였고, 나이는 나보다 몇살 정도 어린 여성분이셨다. 키도 아담하고, 안경을 쓰고 계셨고, 얼굴은 평범하고 귀여운 여성분이셨다. 붙임성도 좋으시고 성격도 외향적인 면이 있으셨다. 이공계 대학을 졸업하고 울산에서 나름 큰 규모 회사의 연구원으로 다니고 계셨고, 영어는 물론이고 공부도 잘하는 분이셨다. 물론 내가 일하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업종과 직종에서 근무를 하고 계셨기에 업무와 관련한 대화의 접점은 전혀 맞출 수 없었다. 대화를 이어가는건 대단히 어려웠다. 어릴때부터 서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던 부분들이 대화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렇게 서로 살아온 인생이 너무도 다른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맞선 소개팅을 하며 상대 이성을 만나고 사귀고 관계를 구축하고 결혼까지 해서 아이를 낳는걸까? 지금의 내 또래 신혼부부들을 보면 너무도 대단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결혼이나 연애는 누구나 쉽게 할수 있는 일 같지만, 나처럼 사십줄 평생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성적 욕망과 성적 유혹의 능력은 개개인 모두가 동일할 수는 없다.
이미 대화 초반부부터 여성분은 자신도 어머님 등쌀에 떠밀려 맞선자리에 오게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원래 지금 맞선자리 외에도 다른 지인들로부터 소개팅 제의도 몇번 들어왔었지만 본인이 원치 않아 거절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상대 여성분도 나와의 맞선자리는 처음부터 볼 의향은 없었고, 결국 본인 어머님의 부탁으로 어쩔수없이 오게 된 것이라는 점을 어필하셨다. 여성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커리어와 나름대로 설계한 꿈과 청사진이 있는 분이셨다. 그리고 현재는 아직 결혼에 대해선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 이런 대화를 이어가면서 느꼈던건 어쩌면 내가 싫고 호감이 가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여성들은 암시적인 언어를 항상 쓰기 때문에 "저는 당신이 별로에요. 만나고 싶지 않아요"를 면전에 대고 할수는 없으니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대화하다가 주제가 생각나지 않아 버퍼링처럼 뚝 끊겨 대화를 잘 이어나가지 못하는 민망한 내 모습도 보였다. 나는 처세술이 너무 부족하고, 대화능력도 떨어지며, 사람관계를 다양하게 형성하는게 어려움이 있는 내 모습이 이번 맞선자리에서 여과없이 드러났다. 반면 여성분의 성향은 나와 정 반대였다. 그리고 대화를 이어가던 중 얼떨결에 나는 한번도 연애를 해본적도, 또래 여성과 친해져본적도 없다고 솔직하게 얘길했다. 여성분도 나에게 "이성도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물론 아직은 어려울것 같다.)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카페에 있다가 마치고 나왔다. 윗 글에 써놓은 것 외에도 많은 대화가 오갔던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진 않아 복원을 못할 것 같다. 여성분은 나의 모습에 부담을 많이 느끼고 불편함이 느껴지는게 보였던것 같다. 초면에 만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건 감정소모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다른 지인과 약속이 있어 가봐야한다고 얘길하셨다. 만약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다음 장소로 같이 가자고 얘길 하거나 아니면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얘길 했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다른 약속을 핑계로 회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튼 나는 좋은 시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장대비가 멎을때 쯤 바로 근처 집에 도착하였다. 예전에 인터넷에 봤던 내용에 따르면 소개팅이나 맞선 후 애프터는 무조건 남자가 해야한다고 돼있었다. 실제로 여성들 상당수가 그러한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보통 남자가 먼저 여성에게 대쉬를 하는게 일반적이니 당연히 애프터도 남자가 먼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있는것 같다. 저녁시간 쯤 되어 나는 문자를 보내드렸다. 사실 난 그 여성분과 굳이 연인사이까지 발전할거란 큰 기대를 할 수 없을것 같았고, 어머님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오빠 동생 사이의 관계로 남아도 충분하단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나 (울산 노총각) : "ㅇㅇ씨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인연이 닿게되어 반갑네요. 댁에 조심히 들어가시구 다음에 또 기회되면 뵙고싶어요"
약 1시간 정도 지나서였을까.. 카톡으로 그 여성분께 답장이 왔다!
(여성분이 늦게 답장을 하시게 된 이유는 다른 약속보다는 아마도 나에게 어떻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서 답변 멘트를 쓸 지를 고민하셨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상대 여성분 : "저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아까 저도 분위기 풀려고 되게 밝게 말하려고 노력했던거거든요. 근데 사실 저랑 성향이 많이 다른것 같아서.. 다음에 또 뵙는건 어려울것 같아요.."
예상했던대로 여성분께서 거절하셨다. 대화를 하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지만 여성분도 카페에서 대놓고 티를 내지 못하셨을 뿐, 나같은 얼굴도 못생기고 대화도 잘 못하고 숫기없는 모쏠 찐따 노총각과 대화를 맞추느라 감정소모에 이미 지칠만큼 지쳐있으셨던것 같다. 30년 넘는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나같은 남자를, 그것도 선자리에서 마주해본 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같은 남자는 이성적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예상했던 답변이었기에 "괜찮아요~ 좋은 인연 만나시길 바랄게요"라고 답장을 보내드리고 서둘러 정리했다. 여성분의 애프터 거절은 무엇보다 나의 원인이 가장 컸다. 내가 외모도 원칠하고 키크고 능력있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편한한 대화와 스윗한 멘트로 남성적인 매력을 전혀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본다. 아마도 다른 남자였다면 상대 여성분은 호감을 느끼고 좀 더 진지하게 만나보려 했을 것임이 자명(自明)하다. 여성분도 결혼적령기라 하기엔 결코 적은 나이(1993년생)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님들끼린 맞선을 주선했다곤 하지만, 정작 맞선을 본 당사자들 남녀 입장에선 맞선도 아니었고, 소개팅도 아니었던, 그런 애매하고 불편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함께 마주하고 대화하며 시간을 보낸, 너무도 다른 인생과 성향을 가지고 살아온, 물과 기름만큼이나 더 다른 30대 남녀의 어설픈 맞선자리였다.
나는 또래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의 능력과 외모는 안되나보다. 자격증은 과년도 기출문제라도 있지만 여자의 마음은 기출문제가 없다.
다음 생애는 키크고 잘생기고 언변도 뛰어나고 외향적인 성격을 갖추고 번듯한 대기업 공기업, 공공기관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다니며 높은 임금을 받는, 또래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완벽한 남성적인 매력을 다 갖춘 존잘 스윗 훈남으로 유복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애는 또래 여자를 만나고 사귀는건 불가능할 것 같다. 나도 감정소모 너무 힘들고, 여성들이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여성들 마음을 맞춰주기도 너무 힘들고 어렵다. 내 인생 챙기기도 바쁘고 돈 모으기도 바쁘고 먹고 살기도 바쁘다.
인간의 존엄성이 자본의 위력에 양보되면 안된다고 했다.(헌법재판소 판결 2013헌가2)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본의 위력이 없이는 여자도 못만나고,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다. 자본의 위력으로 인해 좋아하는 이성과 애틋한 사랑의 낭만조차 누릴수 없는 이 현실은 국민 개개인들의 자유의지 여부를 떠나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할 행복추구권의 박탈과 소수자 외면이나 마찬가진데, 이는 시장경제 논리에따라 철저한 양적 경제성장만을 추구한 과정에서 나타난 심각한 빈부격차, 그로인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몰각된 것은 이 또한 결국 자본의 위력으로 초래된 폐단이 아닐까.
자본의 위력은 국가의 조세 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술, 담배, 도박이 국민들의 조세저항이 별로 없기에 국가 차원에서 건강에 해로운 기호품과 해로운 취미를 묵시적으로 용인해주며 조세수입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음주로 인한 각종 범죄와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주류를 제조 판매하고 있고,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담배피우지 말라면서 편의점, 슈퍼마켓 카운터 계산대에는 요란스럽고 휘황찬란한 담배광고를 내세우며 담배를 제조 판매하고 있다. 도박하지 말라면서 강원랜드 카지노를 만들고, 복권방과 각종 경마, 경륜, 경정을 활성화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자본의 위력에 양보되도록 만든건 나라가 잘못한것이지 우리 국민들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을까. 하기야 높으신 분들은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배운 사람들이기에 그저 자신들의 도덕적 잣대만을 내세우며 눈과 귀를 닫은채 해묵은 꼰대 어른으로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어찌됐든 이번 맞선은 좋은 경험했다 생각하려고 한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래 여성과 말 한마디 섞어볼수 있을까. 차라리 나랑 소통해주는 숲SOUP(옛 아프리카TV) 인터넷방송에 나오는 예쁜 젊은 여캠들 보며 별풍선 후원해주고, 야구장가서 치어리더 젊은 여성들 구경하고, 걸그룹 여자연예인들 좋아하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할 팔자인가보다. 끝.